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우크라이나 대기근 (문단 편집) === 정설: 스탈린 정권의 정치적 탄압과 무지에 의한 인위성[* 스탈린 옹호자들은 해당 내용들을 '집산화 과정에서 일어난 정책실패'나 '집산화 과정의 의도치 않은 기근설'이라는 내용으로 왜곡하려고 시도하나 아래 논문들에는 그런 내용이 없다.] === 대체적으로 학자들은 스탈린의 고의적 [[제노사이드]]설은 인정하지 않으나 제노사이드설이 부정받을 뿐이지 우크라이나 대기근이 '인위적'(man-made)이었다는 정설까지 부정되지 않는다. 여기에서 말하는 인위성은 '''기근 자체가 [[고의]]는 아니지만 기근에 대해 정치적,윤리적으로 책임이 있는 인과관계'''가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스탈린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해방 직후의 제주도에서도 미곡 정책의 실패가 4.3 사건의 하나의 계기가 된 적이 있다.] 이점은 대숙청의 대표적인 '수정주의'로 유명했던 아치 게티의 논문에서도 알 수 있다.[* 물론 그 수정주의란 것도 1980년대 이야기다.] 아치 게티는 제노사이드설을 주장하는 일부 학자들의 증거 없는 주장을 반박하면서도 다음 사실들을 논문에서 지적하였다. >무지에서든 이념에서든 스탈린은 수백만 명의 사망자를 낸 집단화 정책의 창시자이자 수행자였다. 그것은 나나 다른 사람에 의해 논쟁된 적이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쁜 정책은 고의적인 민족 제노사이드가 아니다. > >우크라이나 그리고 다른 지역을 황폐화시킨 기근이 어느정도 사람이 만든 것(some extent man-made)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거의 없지만, 그것이 고의적인 것인지 아닌지는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다. >---- >Getty, J. Arch. "New Sources and Old Narratives." Contemporary European History 27.3 (2018): 450 [[https://doi.org/10.1017/S0960777318000322]] 아치 게티도 우크라이나 대기근이 어느정도 '''사람이 만든 것'''임이 의심의 여지가 거의 없다고 평가했다. >스탈린의 개인 기록 보관소와 서신을 포함한 몇몇의 새롭게 공개된 문서들은 그가 정말로 1920년대 후반의 식량난, 집단화에 대한 저항, 굶주린 지역에서의 농민 탈출, 심지어 기근 그 자체가 조직화된 쿨락의 저항이나 현장에 있는 요원들이 용기가 없는 것이 원인이었다고 믿었다. 그에게 있어, 이점들은 단지 어리석은 정책을 옹호를 위한 전가가 아니었다, 비록 그런 이유도 많았지만. 그는 정말로 믿었다. 적 쿨락들의 교활한 음모에 스탈린주의 상상력은 영원히 사로잡혔다. >---- >Getty, J. Arch. "New Sources and Old Narratives." Contemporary European History 27.3 (2018): 451 [[https://doi.org/10.1017/S0960777318000322]] 스탈린 정권이 상상력에 의한 믿음으로 탄압했음을 설명한다. >우리가 찾은 특별한 서류철에서, 예를 들면, 스탈린이 내린 비밀 명령으로 곡물 수출을 줄이거나, 곡물의 정확한 양을 줄이거나 씨앗(곡물 종자)을 마을로 보낼 것을 지시했다. 아마 스탈린은 그의 당이 직면한 것을 방해하지 않기위해 그 모든 것을 극비로 해야한다고 판단: 포기해서는 안 된다. 주저하는 것은 광범위한 후퇴를 촉발시킬 수 있다. 만약 스탈린이 다른 사람들을 돕고 있다는 것을 일부 지방들이 알게 된다면 무자비한 정책의 개념이 약화된다. >---- >Getty, J. Arch. "New Sources and Old Narratives." Contemporary European History 27.3 (2018):452 스탈린이 무고한 피해자가 있음을 알고 일부를 구제하기 했지만 이것은 '''비밀 명령'''이었고 그 사실을 '''극비'''로 해서 다른 지역에 알려지지 못하게 했다. 스탈린에겐 제노사이드가 의도는 분명히 없었고 무고한 희생이 존재함을 나중에 알고 일부 피해자들을 구제하긴 했지만 이 점을 고의적으로 숨겼다. 그리고 자신의 상상력에 근거해 정책을 계속 수행했고, 잘못이 드러나자 타인에게 책임도 전가했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제노사이드설만을 부정할 뿐이지 스탈린 정권이 '만들었다'는 사실까지 부정하지 않는다. 이건 아치 게티조차 마찬가지다.[* 아치 게티는 대숙청에 대한 80년대 수정주의로 유명하지만 단 한번도 스탈린의 테러를 옹호하거나 긍정한 적이 없다.] 아치 게티도 스탈린이 부당한 비판을 받는다는 주장 같은 건 하지 않았고 스탈린이 일부 농민들을 구제한 사실은 극비명령이었기에 아치 게티도 스탈린을 옹호하는 맥락으로 인용하지 않았다. 아치 게티는 대기근이 스탈린 정권의 무지나 이념으로 만들어낸 결과라는 건 인정하고 짚어 넘어간 다음에 제노사이드설을 반박했다. 대기근이 소련의 정치적 탄압의 결과로 평가받음은 러시아의 전문 논문에서 볼 수 있다. >국제적인 학술단체 «메모리얼» 관리국장 А.Б.로긴스코에 따르면, 소련에서는 1921년 이래 정치적 이유가 있는 형사법적 사건이 5백만건이 된다. 이들 중 약 10%가 유죄 판결을 여러 차례 받은 것을 고려하면, 정치적 테러의 희생자 수는 450만명이 된다. 여기에 보충하면 강제추방된 700만 명이 있다. 그러므로 소련이 정치적 이유로 광범위하게 일삼은 탄압에 발생한 희생자의 수는 약 1150-1250만명이다.(이 숫자는 내전[레닌시기 러시아 내전] 희생자의 상당수가 제외됐다.) 또한 이 숫자에는 1921—1922, 1932−1933, 1946−1947년에 발생한 «라스쿨라치바니예[내쫒음, 강탈]» 및 홀로도모르 피해자들이 제외됐다. 최소 500만명의 목숨을 빼앗은 1920년대 초반 기근, 최대 6,7백만명 희생자를 낸 1932-1933년 기근, 최대 150만명의 희생자는 낸 1946-1947년 기근: [정치적 탄압에서 발생한 희생자 수에]기근의 사망률을 제외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제외시킬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사망자가 정치적 해결법과 경제적 계산 착오에서 발생했기 때문이다. >(По мнению председателя правления Международного общества «Мемориал» А.Б. Рогинского, с 1921 г. в СССР на преследуемых по политическим мотивам было заведено 5 млн уголовных дел. Если учесть, что примерно 10% из них были осуждены несколько раз, число жертв политического террора составит 4,5 млн чел. К ним следует прибавить примерно 7 млн депортированных. Таким образом, количество пострадавших от массовых политических репрессий в СССР составляло около 11,5−12,5 млн чел. (без учёта значительной части жертв Гражданской войны). Также в это число не входят «раскулаченные» и жертвы голодоморов 1921—1922, 1932−1933, 1946−1947 гг. [37] От этого нельзя абстрагироваться, поскольку голодная смертность была вызвана в первую очередь политическими решениями и хозяйственными просчётами: голодов начала 1920-х гг. унёс не менее 5 млн жизней, 1932−1933 гг. — до 6−7 млн жертв, в 1946—1947 гг. — до 1,5 млн.) > >«소비에트 마을의 비극» 계획 관계자들은 «커다란 테러»[한국에선 '대숙청'이라 부른다.]의 희생자 숫자를 보다 정확하게 집계했다: 전에 생각되던 68만 2천 명이 아닌 72만 5천−74만 명, 체포자가 판결을 총살형으로 받은 현상이 현저히 더 크게 발생한 건 1937-1938년이었다. 일부 특히 잔인하고 난폭한 징벌 정책 사항에 대해서는 몇개의 연구가 있다, 예를 들면 1933년 나림스콤 지방 유형자들의 광범위한 전멸의 역사에 대한 연구가 있다. «청소»당한 숫자를 포함하여, 형사법 위반 범죄자 중 제일 작은 경범죄에 속한 자들, 또한 강제 집단화에 반대한 사람들, 방랑자, 집시들이 시베리아 습지에서 먹을 것도 거처도 없이 상습적 범죄자들과 함께 추방당해서 그 상습적인 범죄자들에 의해 테러를 당할 운명들, 이 출판물은 이런 점들을 인상적으로 생기가 넘치게 묘사한다, 망명자와 더불어, 정권 가장자리에 있는 대량의 버림받은 피압박자 집단에 대해 혁신적 연구성과를 낸 전문적인 논문이다. >(Участники проекта «Трагедия советской деревни» уточнили количество жертв «Большого террора»: к расстрелу в 1937—1938 гг. было приговорено заметно большее число арестованных — не 682 тыс., как ранее считалось, а примерно 725−740 тыс. Часть особенно жестоких эксцессов карательной политики стала предметом отдельных исследований, например, история массовой гибели ссыльных в 1933 г. в Нарымском крае, на о. Назино. Эти издания дают впечатляющую картину того, как в число «вычищаемых» в ходе паспортизации были включены, наряду с меньшей частью криминального элемента, также противники насильственной коллективизации, бродяги, цыгане, оказавшиеся затем в сибирских болотах, без еды и жилья, обречённые на террор со стороны высланных вместе с ними уголовников-рецидивистов и мучительную смерть. Новаторский характер носит недавняя коллективная монография о многочисленных маргинальных париях режима, в том числе ссыльных.) > >공산주의 테러가 다양한 기능을 수행했음을 연구원들은 현재 인정한다.(겁을 주는 실재하거나 상상된 적대자를 제거, 볼셰비키 독재의 강화, 새로운 사회체제 편성, 적대적 사회집단의 대표자 인물들과 민족집단에 대한 청소) 연구자들은 보편적인 단 한가지로 설명하는 것을 거부한다. >신중한 서구의 역사가들 중 많은 사람들이 다음과 같은 설명에 동의한다, 테러 및 독재 형벌 기관이 레닌주의-스탈린주의 시기 에 사회적-경제적 및 군사적-외교적 해결과제를 유효하게 해결하려는 욕구를 위해 강요됐다는 것, 탄압이 사회주의적 근대화의 피할 수 없는 대가라는 것을 이해한다. >(В настоящее время исследователи признают, что коммунистический террор выполнял целый ряд функций (устрашение ликвидацией реальных и мнимых противников, укрепление большевистской диктатуры, формирование нового общества, очищенного от представителей враждебных социальных, а также национальных групп), отказываясь от какого-то одного универсального объяснения. Среди серьёзных западных историков многие согласны объяснять террор и всевластие карательных органов ленинско-сталинского периода вынужденным стремлением эффективно решить социально-экономические и военно-дипломатические проблемы, видеть в репрессиях неизбежную плату за социалистическую модернизацию.) > >Тепляков, А. Г. "Эпоха репрессий: субъекты и объекты." Между канунами. Исторические исследования в России за последние 25 лет. 2013 >https://www.elibrary.ru/item.asp?id=24932330 >http://rusk.ru/st.php?idar=68533 역사학자들은 고의적 기근설(고의적 제노사이드설)을 반박할 뿐이지 기근의 인위적 여부를 부정하는 게 아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